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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명성황후 재조명…시리즈①

<여주> 명성황후 재조명…시리즈①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4.12.10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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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용안 복원이 필요하다”

▲ 2000년 고증을 통해 권오창 화백이 제작한 어진

여주신문은 여주에서 태어난 우리나라 국모 명성황후에 대해 3편에 걸쳐 여주시청, 여주문화원, 명성황후 생가 유적관리소, 전문가 등의 자문을 통해 1편 황후의 용안 복원, 2편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한 히젠도 환수 필요, 3편 황후 관련단체 등을 게재한다.[편집자 주]


-명성황후는?

▶명성황후는 1851년(철종2) 음력 9월25일 여주군 근동면 섬락리 지금의 여주시 명성로 71 능현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민치록(1799~1858)으로 1830년(순조30) 참봉을 시작으로 과천현감 (종6품), 임피현령(종5품), 덕천군수(종4품), 장악원 첨정(僉正 종4품)을 거쳐 영천군수(종4품)를 지냈다. 민치록의 첫 번째 부인은 해령부부인으로 추증된 해주 오씨(1788 ~1833)로 조선말기의 유명한 노학자 오희상(吳熙常)의 딸 이었는데 자녀를 낳지 못하고 죽었다. 두 번째 부인 (한산 이씨 1818~ 1874 한창부부인)이 명성황후의 생모로서 훗날 민승호와 함께 죽동궁에서 폭사 당한 바로 그 이다.
 

민치록은 여양부원군 민유증의 종손으로 묘를 지키며 묘막에서 살다가 명성황후를 낳았다. 명성황후가 몇 살까지 여주에 살았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안국동에 있던 감고당(현재 능현동 이전)에서 1858년 민치록이 사망했다는 기록으로 봐서 7~8세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1866년 만14세에 우리나라 국모로 간택됐다.
 

1872년 명성황후는 원자를 낳았지만 통변불능이라는 선천적 결함으로 태어난지 4일만인 11월8일 숨졌다. 명성황후의 슬픔은 극에 달했으며, 원인으로 흥선대원군이 보낸 산삼탕과 연관지으면서 미운 감정은 증오로 변하게 됐다. 1873년 고종이 23세 되던 해 천정 선포 10년 대원군 세도의 막을 내리면서 명성황후가 전면에 등장했다.
 

명성황후는 쇄국정치가 아닌 개혁을 위해 개항정치를 펼쳤지만 임오군란의 빌미를 제공했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소비성 상품을 팔고 곡식과 원료를 사가면서 조선의 쌀이 부족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흉년과 지방관리의 비리로 중앙관리는 6년간 녹봉을 받지 못하고 구식군인들에게 13개월분의 급료를 지불하지 못했다.
 

1882년 6월5일 한달분의 급료를 지불하는 과정에서 썩은 쌀이거나 돌이 섞여 구식군인들이 난을 일으켰다. 이것이 임오군란으로 명성황후는 창덕궁을 탈출해 여주 민영위 집에 숨었다. 최근에는 명성황후 생가를 소유했던 민경진(41·능현동)씨는 할머니로 부터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능현동에서 일주일 머물렀다고 한다. 임오군란 50여일만인 8월1일 장호원에 있던 명성황후는 영의정 이하 대신들과 청나라 군사의 호위를 받으며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명성황후는 왜 사진이 없나?

▶명성황후는 개혁파로 미국 감리교 여선교사 스크랜튼이 여성교육기관을 설립했는데 황후는 이 교육기관을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1887년 초봄 경복궁에 전기가 가설되고 1883년 3월에는 미국인 여의사 홀튼을 전속의사로 선임하고 커피와 홍차를 즐겨 마셨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이 친러파를 증용하고 조선의 왕권을 회복하면서 자신들이 야욕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우려해 1895년 8월2일 명성황후 시해를 계획한다.
 

일본은 조선을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명성황후가 서구 열강들과 손잡는 것이 못마땅했다. 일본낭인 30여명, 경찰 10여명, 조선 훈현대, 일본 수비대로 구성 8월22일 거사를 하려했다.
 

그러나 8월19일 훈련대 해산과 무장해제를 단행하겠다며 미우라 일본공사에게 통보했다. 이로 인해 다급해진 일본은 8월20일 새벽 5시30분 여주사냥이라는 작전이 시행됐다. 이들은 옥호루에 난입 명성황후를 찾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낭인들은 황후라고 생각되는 여인 3명을 살해했다. 황후는 이경직이 보호하기 위해 몸으로 막는 순간 몸을 피해다가 이들에게 붙잡혀 수차례 가슴을 짓밟히고 칼에 찔렸다. 이들은 명성황후 시해 증거를 없애고 흥선대원군과 정치적 문제로 우발적으로 시해된 것으로 조작하기 위해 황후의 시신을 뼈만 남을 때까지 불에 태웠다. 이때 황후 나이가 44세였다.
 

일본은 명성황후에 대해 모든 것을 말살하고 왜곡시키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도 명성황후를 언론이나 국민들 사이에서 민비로 불려졌다. 그런 일본이 명성황후와 관련된 자료를 모두 없애버렸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명성황후 생가 관계자나 여주문화원 조성문 사무국장에 따르면 고종 황제가 명성황후 사진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방을 통해 황후의 사진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후한 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 궁을 장악한 상태로 황제에게 바쳐질 황후 사진들이 모두 사라졌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교과서나 인터넷 등에 올라오는 사진 또한 가짜로 판명나면서 황후의 용안은 역사속의 미스터리로 남고 있다.


▲ 황후가 시해된 경복궁 옥호루

-동상과 어진 과연 명성황후 맞나?

▶명성황후 생가 입구에 있는 동상, 생가 안에 있는 동상, 전시관에 있는 어진 모두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고증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당시 여성과 달리 키가 163cm 정도로 큰 키에 빼어난 미모를 갖췄다.
 

명성황후 생가에는 황후를 아련한 외국인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 지리학자이면서 여행가인 이사벨 비숍(국적 불명)은 “윤기 나는 새카만 머리와 흰피부를 가졌고 몸매가 호리호리한 잘 생긴 부인이었다”고 기록했다.
 

미국의 언더우드 선교사는 “폭 넓고 진보적인 정책과 국민복지를 추구했다. 따뜻한 온정과 어린이들에게 부드러운 사랑을 주었다. 재치있는 외교관 같으며 늘 반대자를 이겼다”라고 했다.
황후 시해범인 이노우에 일본공사는 “아름답고 성품과 탁월한 능력을 가지 귀부인이었다”고 기록했다.

이밖에도 여러 자료가 보관돼 있어 황후의 용안을 가늠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2008년 작고한 명성황후 추모사업회 이영숙 회장이 2000년 권오창 화백에게 어진을 의뢰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황후를 아련한 외교관 등의 기록 등 고증을 거쳐 제작된 어진은 전문가들이 황후와 가장 가까울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어진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황후의 눈이 과장되게 날카롭다는 주장이다. 전문가들은 황후를 아련할 때 직접 쳐다보지 못하고 항상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봤기 때문에 눈이 왜곡됐다는 주장이다.


-명성황후 용안 복원 방법은?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용안이 찍힌 사진이나 초상화를 찾는 것이다. 이를 찾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방으로 수소문 하고 있다.
 

몇 년전 조성문 사무국장은 답답한 마음에 무속인 찾아가 명성황후 용안이 어디 있는지 점을 본적이 있다고 한다. 고종황제가 사랑해 사진을 찾았던 명성황후 용안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들이 애타게 찾고 있지만 정확한 자료가 나오고 있지 않고 있다.
 

지금의 어진은 황후를 아련한 사람들의 기록을 토대로 제작됐지만 추상적이라는 의견과 눈 모양새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새로 어진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명성황후 직계 가족 중 여성의 얼굴을 토대로 제작하는 방안이다.
 

여주문화원과 명성황후 생가 관리사무소에 자문을 받아 직계 가족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직계가족은 이미 없고 황후가 낳은 공주 또한 출생 후 숨져 이 또한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명성황후 생가에서 출생한 여성 중에 성품이나 인품이 가장 가까운 사람의 얼굴을 토대로 제작하는 방안도 제시되고 있다.
 

명성황후 생가에서 태어난 사람은 여러명 있지만 황후의 성품과 리더십이 비슷한 이상빈(27·여)씨를 지목하고 있다. 2년간 그를 가르쳤던 스승은 역사속에서 본 명상황후와 가장 비슷하다고 말했다.
 

명성황후의 표준 어진을 위해 다각적인 방안이 제시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황후의 용안이 찍혀 있는 사진이 발견되기 까지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언론이나 교과서 등에 사용되고 있는 어진이 표준화로 사용되고 있지만 논란의 불씨가 남아있는 지금 여주시와 관련 기관, 단체들이 황후의 모습을 찾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진제공=여주시청

【자문 = 여주문화원 조성문 사무국장, 명황황후생가 관리소, 명성황후 추모사업회 황선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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